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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도시 교토 Icon 역사의 도시 교토

역사도시 교토


 교토는 794년에 일본의 수도 “헤안경”으로서 건립된 이래, 1200년의 역사를 가지는 오래된 도시이다. 건설 이래 수차례의 시련을 경험하며 크게 변화하였지만 항상 그 시대에 조응한 첨단 장치를 도입하여 산업, 경제, 문화 발전에 국가적 규모로 기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웅자를 전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교토는 각 시대의 문화적 소산을 “시대의 증표”로서 교토 전역에 남겨왔다. 사원 및 신사 등의 고건축물을 비롯해 전통가옥에 이르기까지 교토풍 건축물의 존재가 이를 나타내고 있으며, 더욱이 다수의 제사와 축제, 전통산업의 전개는 1200년 문화의 계승과 발전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헤안경은 거대했다. 남북으로 약 5.2km, 동서로 약4.7km의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성, 대도시였다. 스자쿠오지(폭 약85m)를 중심으로 좌측에 사쿄, 우측에 우쿄가 있었으며, 여기에 최대 15만 명의 시민들이 살았다. 좌우로는 일본 최대의 국영시장이 있었으며 최첨단 기술과 기능을 가진 장인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헤안경의 북부에는 오다이리라 불리는 다이리(천황의 주거지)와 각 관청이 모여 있는 지역이 있었다. 일본 정치의 중심이었지만 여기에는 천황을 비롯한 귀족, 관원, 병사들이 근무하며 그 주변지역에는 관영 거리가 있었으며 정돈된 거리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양버들과 벚꽃이 뒤섞여 수도가 꽃비단과 같구나!”라는 것은 헤안경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시대의 경관을 영탄한 것이지만, 이 헤안경도 약 200년을 경과한 10세기 중반부터는 점차 변모하기 시작했다. 헤안경의 우쿄가 도시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습하고 윤기 있는 토지였던 우쿄가 원래의 전원지대로 되돌아가 인구가 감소한 것이다. 헤안경은 사쿄를 중심으로 인구를 밀집시키는 한편으로 교토성을 넘어서 가모가와강의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도 도시를 발전시켰다.
 이미 헤안경은 균형 잡힌 대도시의 모습을 상실하였다.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헤안경은 “교토”라는 새로운 고유명사가 부여된 것이다.
 중세의 개막과 함께 교토라는 지명이 정착되었다. 왕조정부의 약화가 무사정권 탄생을 유발하여 교토는 통치하는 수도에서부터 통치받는 수도로 변모하였다. 무사정권의 거점으로 가모가와 동부에 시가지가 출현하여 새로운 도시경관을 히가시야마 일대에 형성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중세의 교토는 신 불교진흥의 중심지가 되어 기타야마, 히가시야마, 니시야마의 산록에는 많은 사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며 더욱이 헤안경에는 원칙적으로 도지절과 사이지절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원이 도시민의 지원을 배경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13세기, 14세기, 15세기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증가하여 이곳 교토는 종교 문화도시로서의 새로운 경관과 성격을 부여받았다.
 한편 중세 교토 도시민의 움직임은 활발하였다. 과거 고대시대에는 국영산업에 종사하였던 다수의 상공인들이 그 산업이 몰락함에 따라 독립을 강요당해 스스로 “자”(공동조합)를 결성하여 영업권익을 사수하였으며 전대 이상으로 산업,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그 기세는 행정,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시에 시민의 공통된 의사가 무엇보다 잘 표현된 것이 기온 축제였다. 중세의 교토는 상공업 도시로서는 일본 최대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겨우 완성된 이 중세 교토도 15세기 후반 11년간에 걸친 내란 “오닌, 분메이의 대반란”에 의해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이 타격으로부터 회복하기까지 25년의 시간을 필요로 하였지만, 결국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다. 일체화된 교토는 사라지고 가미교와 시모교 사이에는 약 2km에 걸친 전원지대가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쌍둥이 도시와도 같은 교토였다.
 이 같은 도시경관은 그 후 약 1세기 동안 계속되었지만, 이 교토를 근본적으로 개조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정권이었다. 가미교와 시모교의 공백을 없애고 도시화를 계획적으로 추진하여 교토 일체화의 대사업을 단행하였다. 그 도시의 주변을 토담으로 둘러싼 것도 교토 성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심부에는 재건된 고쇼 황궁이 있었으며 신축된 슈라쿠다이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근세의 교토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정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도쿠가와 정권에 의해 사원의 부흥사업이 두드러졌으며 중세 이후 종교 문화도시로서의 면목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산업도시로서의 회복상은 더욱 현저하였으며 17세기 말의 니시진 염직업은 세계 굴지의 염직업 지역으로서 알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토는 그 후 지속적인 성장만을 한 것은 아니다. 호에이의 대화재, 덴메이의 대화재, 겐지의 대화재, 그리고 18세기부터 19세기 중엽에 걸쳐 3번의 대화재를 경험하였다. 이 화재에도 교토는 굴복하지 않고 복구에 노력하였지만, 마지막 겐지의 대화재는 변혁기였던 만큼 그 회복은 메이지시대에까지 지연되었다.
 에도에 정치적 수도를 빼앗긴 근세의 교토. 그 수도의 지위는 메이지 초년 1868년에 일시적으로 교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 상황은 또 다시 수도를 도쿄로 옮기게 만들었다. 교토 시민의 항의 대모에도 불구하고 천황은 도쿄로 향하였다. 과거의 귀족, 그리고 유력자들도 그 뒤를 따라 교토를 등졌다.
 교토의 위기적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으며 실망의 언성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교토는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고 폐허가 된 도시의 부흥에 노력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대담한 혁신이 없이는 그 위기를 돌파할 수 없었다. 비난을 받으면서도 유통, 에너지, 수자원 확보를 위한 기반 정비, 비와코호수 인공수로 건설을 비롯한 니시진 염직업의 기술혁신, 신공장 건설 등으로 착실하게 신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들 100년 사업에 바탕을 둔 대구상은 1895년 천도 1100년을 기념한 제4회 전국 권업박람회 개최로의 원동력으로 이어졌으며, 더욱이 그 혁신의지는 1907년 이후 20세기에 시작된 “3대 사업”으로 연결되었다. 막대한 자원을 투자하여 이행된 이 사업은 약 10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이에 의해 교토는 처음으로 근대도시에 걸맞은 대개조를 단행한 것이다.
 현대의 교토는 제2차 세계대전의 병화에도 살아남아 많은 발전을 이룩해 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업적을 자랑하는 학술기관 및 첨단 산업을 산출하는 한편, 저명한 문화유산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교토는 그것들에 만족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고자 한다. 만약 이 같은 노력이 없다면 1200년 역사의 이 대도시는 그 역사의 불씨를 꺼뜨려 버리기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교토는 결코 박물관 도시가 아니다. 역사도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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